내과 리트릿
선린병원에 와서 처음 들어 본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이 '리트릿' 이라는 말입니다. 사용 용도로 보아 하니 1일 수련회, MT 등과 유사한 것 같은데 이 곳에선 아주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용어입니다. CCC 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라는데...선린병원에 온 사람들 중 많은 분들이 CCC 출신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쓰이나 봅니다. 사전을 찾아 보니 아래와 같더군요.
retreat [ritríːt] n. U,C ① 퇴각, 퇴거; C 퇴각 신호. ② (일몰시의) 귀영 북[나팔], 국기 하기식(國旗下旗式). ③ U 은퇴, 은둔. ④ C 은퇴처, 은신처, 피난처; (취한․미치광이 등의) 수용소. ⑤ 〖교회〗 묵상; 피정(避靜)(일정 기간 조용한 곳에서 하는 종교적 수련)
어쨋든 이 '리트릿' 이란 것이 선린병원에는 자주 있는데 전체 임상 과장이 함께 모여 수련회(?)를 가지는 '임상과장 리트릿' 이 몇 주 전에 양포 수양관에서 있었고, 지난 주에는 내과 과장과 전공의 들이 함께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며 삶을 나누는 '내과 리트릿' 이 열렸습니다.
내과 리트릿 날에는 입원 환자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내과 과장 한 분과 가정의학과 전공의가 당직 대기) 를 취해 두고 모든 의국원들이 참석하게 됩니다. 이번 리트릿은 비가 부슬부슬 오는 저녁 무렵 시작되었습니다. 병원 차를 타고 안강의 어느 별장으로 이동했는데 모 과장님 아는 분을 통해 하룻밤 사용하기로 허락 받은 장소입니다. 우린 동화처럼 지어 놓은 예쁜 별장에 들어 와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정작 아름다운 것은 별장이 아니라 이 날의 모임이었습니다.
선린병원 내과 전공의 들은 부산, 충청, 수도권 등...전국 각지에서 왔습니다. 다들 나름대로 사연이 있고 포항에 있는 선린병원까지 내과 수련을 위해 온 데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교기지병원' 선린병원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작한 전공의 생활은 제 한 몸 추스르기도 힘든 1년차 생활을 시작하면서 깨어지기 시작하고 이 광야 생활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철저히 깨닫게 되지요. 선린병원 내과 전공의들은 아마도 국내 2차 병원 전공의 중에선 가장 힘든 생활을 하고 있을 겁니다. 12명의 내과 과장에 입원 환자수도 많은데...전공의 정원은 겨우 연차당 2명 뿐이라 모두 8명에 불과합니다.
운치 있는 별장에 모여 가져 온 도시락을 나눠 먹은 뒤 찬양으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 듣기 원하네','나를 세상의 빛으로','나 무엇과도 주님과 바꾸지 않으리','나의 마음을 정금과 같이','주 내 삶의 주인되시고','주께 가까이' 같은 곡들이죠. 지붕이 나즈막하고 공명이 잘 되는 별장 거실에서 모두 함께 모여 부른 찬양 소리는 오랜만에 느껴지는 특별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번 리트릿의 주제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선린병원에서 수 많은 사역들과 해외의료선교가 이뤄지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온전히 높이고 경배하는 것, 포도나무이신 그 분께 붙어 그 분과 동행하는 것이기에 이런 부분에 대한 도전과 기도가 이어졌습니다.
찬양 후에 돌아가며 얘기하는 모습입니다. 질문 리스트를 미리 준비해 놓고 두 개의 주사위를 굴려 합한 숫자에 해당하는 질문에 답하는 형식인데...특히 8번 '한동대학교 선린병원 내과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가 가장 많이 나온 질문이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이날 밤 우리에게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하셨나 봅니다. 예배하는 공동체,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환자를 잘 보는 것은 기본이다...좀 더 자주 찬양모임과 기도 모임을 갖자...전공의 3년차 시기에 선교훈련을 받는게 유익했다... 등 다양한 얘기들이 나왔습니다.
선린병원 내과 의국은 특별합니다. 많은 크리스챤 의사들이 병원에서 수련받는 동안 술이나 비신앙적인 의국 문화로 갈등을 겪지만 이곳에선 그렇게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의국 모임(초독이나 세미나) 전에도 기도로 시작하고, 회진 시에도 기도가 있고, 단기선교여행을 다녀 온 뒤 의국에서 보고할 수 있는 분위기에다... 내과 전공의 모두가 1년에 한 차례씩 단기선교여행을 나가야 하고 내과 3,4년차때는 1개월씩 선교지에서 파견 근무하도록 되어 있으니...이런 곳은 어디서도 찾기 어려운 곳입니다. 게다가 오늘처럼 리트릿을 통해 학기마다 한 번씩 과장과 전공의가 함께 모여 어려운 병원 생활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강한 끈을 형성하고 있으니 참으로 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외적인 핍박이 없다고 해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전공의들의 과중한 업무는 차치하더라도...우리는 늘 '왜 나를 이곳 포항으로 부르셨는가?' 라는 물음에 대답해야 하며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치열한 영적 전투를 벌여야 하니까요. 이런 외로운 고갯길에서 함께 가는 동료들이 있다는 건...하나님이 주신 위로입니다.
이 사진은 지난 3월에 있었던 내과 리트릿 모습입니다. 포항 청룡회관에서 열였었는데 제가 선린병원에 온 지 열흘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이였습니다. 그 때의 주제는 '내가 병원을 나가고 싶었을 때...' 였는데 각 전공의 선생님들이 자신의 위기 상황을 담담하게 얘기하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힘든 전공의 생활을 하다보면 그냥 병원을 그만두고 나가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끼게 됩니다. 이런 어려운 고비를 어떻게 넘겼는지 듣고 과장과 전공의가 한 마음으로 기도했던 시간이 기억납니다.
선린병원은 530 병상 규모의 포항 최대 병원이지만 여전히 낙후된 부분도 있습니다. 내과 의국도 전공의를 한 명 더 뽑기 위해 몇 년전부터 노력해 왔지만 내과 전공의 인원은 여전히 년차 당 2명으로 묶여 있습니다. 과중한 업무와 부족한 제반 여건으로 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내과 의국이지만 지금처럼 초심을 잃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만 있다면 그 분은 우리 모습을 기뻐 받으시리라 기대합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우리 삶에 허락하신 일용할 양식들을 누리며 서로 사랑하며 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06.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