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티에서 보내는 편지 - 2022년 6월 (67호/ 마지막 호)

 주 안에서 열방의 증인으로 함께 부름받은 동역자님께 한국에서 문안드립니다. 이제는 알마티가 아니라 한국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지난 6월 23일, 저희 가정은 12년간의 해외사역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카작을 떠나기 직전까지 연이어 열린 송별회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출국 당일 알마티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하고 나서야 떠난다는 것이 실감났습니다. 그렇게 우릴 향해 손 흔드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그 땅을 떠났습니다. 기도 제목이던 태풍이(우리와 11년간 함께 살았던 세퍼드) 문제는 저희 집에 새로 들어오게 된 텐샨학교 미국인 선생님 부부가 태풍이를 맡아 기르시는 걸로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떠나는 우리 가족이 너무 마음 아프지 않게 태풍이를 위해 좋은 분으로 예비해 주셨습니다.

한국에 와서 첫 몇 달은 카자흐스탄을 떠났다는 슬픔과 낯선 한국에서 느끼는 서러움이 혼재하던 시간이었습니다. 7월에는 주파송교회인 포항충진교회에 선교보고를 하며 기도해 주신 성도님들과 반가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후 부산의대기독학생회를 중심으로 부산, 경남, 경북 지역의 후원자님들을 만나는 크고 작은 모임이 있었습니다. 지난 12년간 같은 마음으로 후원해 주신 신실한 분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큰 위로가 됩니다. 그 분들의 머리카락도 어느새 희끗해졌고 아이들도 못 알아볼만큼 자랐지만 녹록치 않은 현실 속에서 끝까지 믿음 지키며 헌신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면 저희도 새 힘이 솟아 납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가 찾아뵙지 못한 후원자님들이 계십니다. 이 글로나마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앞으로 천천히 한 분씩 만나게 되길 기대합니다.  

1. 전환기 선교사

 저희 파송단체인 한국 인터서브는 사역 현장에서 장기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선교사에게 '전환기 선교사(Partner in Transition)' 이라는 지위를 부여합니다. 저희도 필드를 떠날 때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최근 코로나 사태를 거치며 본부에서도 이런 제도를 운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최대 2년까지 PIT로 선교사 지위를 유지하며 한국 재적응, 쉼과 재충전, 지난 사역 시간에 대한 정리, 재교육 등의 시간을 가진다고 합니다. PIT 기간이 끝나면 다양한 진로로 가게 되는데 선교사 사임이나 다른 선교지로의 파송 혹은 국내 사역으로의 전환 등이 대표적이라고 합니다.

 한국으로 들어온 뒤 저희들의 정체성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는데 PIT (Partner in Transition) 제도가 있다는게 참 감사했습니다. 저희처럼 한국으로 귀국한 다른 선교사님들과 만남을 가질 수 있고 향후 사역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귀한 울타리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저희는 2023년 6월까지만 PIT 지위를 유지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저희를 후원해주시는 교회나 개인 후원자들은 2022년 12월로 모든 후원이 종료되고 2023년부터는 저희 가정은 그 어떤 후원도 받지 않게 됩니다. 그동안 많은 분들이 부족한 저희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재정 후원을 해 주셨습니다. 그 손길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많은 분들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이것이 우리에게 큰 표징이 되었습니다. 이 일의 선봉에 서 주신 포항충진교회, 부산의대기독학생회 졸업생들, 포항선린병원, 대구동산의료원, 포항하나교회, 마산광려교회 그리고 많은 개인 후원자님들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

2. 새로운 변화

저희 가정은 8월 30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으로 이사 왔습니다. 이성훈 M이 관악구 신림역 근처 양지병원에서 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12년간 한국 의사로 살지 않았기에 병원 생활을 새로 시작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습니다.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책장에서 다시 책을 꺼내는 것처럼 한국에서의 의료 지식과 병원 생활은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모든 것을 새로 배우고 익혀야만 합니다. 그래도 응급실 환자나 중환자실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이 병원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지금도 병원 엘리베이터 앞에 서면 지난 12년이 꿈만 같이 느껴지고 마치 시간여행을 한 것만 같습니다. 신기한 것은 이성훈 M이 일하는 병원에 러시아나 카자흐스탄에서 온 환자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국제병원을 통해 이곳에 오는 카작 환자들은 카작어를 구사하는 이성훈 M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사진을 찍어 갑니다. 얼마 전에는 카자흐스탄에서 온 의료진이 팀을 이뤄 이 병원을 방문했는데 그 날 저녁 카작 의사들과 함께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실 앞으로의 여정도 기대됩니다.

이선화 M 역시 완전 다른 삶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지난 12년간 텐샨학교 행정 업무와 카작 교인들과의 만남과 심방에만 익숙해 있다가 이제는 한국에서 살림을 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식사를 준비하는 전업주부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두고온 카작 교회 지체들과의 모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2년 전, 코로나로 대면모임이 불가능하던 시절에 시작된 온라인 아침 기도회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온라인 모임이 일상이 된 것이 이선화 M에게는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국에서도 카작 말로 그 곳 사람들과 말씀을 나누고 기도할 수 있으니까요.

매일 알마티 시간 아침 6시, 한국시간 아침 9시면 카작 자매들과 말씀을 나누고 삶을 나눈 뒤 기도회를 함께 합니다. 시간에 맞춰 들어오는 사람도 있고 늦게 들어오는 사람도 있지만 이렇게 만나면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하루 아침에 믿음이 자라지는 않지만 함께 읽는 말씀들로 인해 콩나무 시루에 붓는 물처럼 우리의 믿음이 자랍니다. 이 말씀들이 아침 이슬이 되어 날마다 우리를 깨웁니다. 감사한 것은 현지 성도들의 기도 제목의 변화입니다. 처음에는 개인이나 가족 문제였지만 이제는 국가와 세계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언젠가 알리야가 카작에 와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자고 말할 때 깜짝 놀랐습니다. 어떤 교인은 카작 성도 중에서도 다른 나라에 선교사로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교회 리더인 쿠므스아이의 딸인 딜랴는 교통이 어려운 외곽 지역에 사는데다 성격 강한 남편 밑에서 기가 많이 죽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남편 성격이 바뀌도록 기도해달라고 하다가 이제는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선화 M은 이렇게 우리의 새로운 삶도 나눌 수 있는 카작 공동체가 곁에 있어 정서적 안정감을 많이 얻고 있습니다.

3. 삼남매

 우리가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 배경에는 우리 삶의 사이클을 따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12년 전, 우리 부부는 더 젊었고 더 열정이 넘쳤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지요. 우리에겐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2년 후, 이제는 삼남매 모두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의료사역의 문이 안 열리는 상황에서 모든 것들이 우리가 한국으로 들어오게끔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3월, 군대에 간 형민이는 이제 논산 훈련소 조교 생활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벌써 상병 2호봉이네요. 휴가도 벌써 3번 나왔고 오는 1월에도 정기 휴가를 나온다고 합니다. 내년 9월에 군 제대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휴가 나올 때마다 그만큼 성숙한 형민이를 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시은이는 이제 1학년 마치고 기말고사 치르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축구에 열심이고 교회 대학부 임원이 되어 이리 저리 뛰어 다닙니다. 요즘은 빵집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지요. 막내 성은이도 서브웨이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마지막 변수인 추가 합격자 발표가 있긴 하지만 내년 3월부터 연세대학교 생명공학부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할 것 같습니다. 우리보다 더 낯선 나라에서 살아가게 될 삼남매 때문에 저희 부부는 서울에서의 재정착을 결정했습니다. 저희보다 힘들 삼남매 곁에서 한국에서의 재적응을 함께 견뎌 나가기로 한 것이죠. 덕분에 시은이는 이제 기숙사가 아니라 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고 지난 학기에 비해 정서적으로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내년 1월 24일, 이선화 M 과 시은, 성은이는 카자흐스탄을 방문할 계획입니다. 아직 카자흐스탄에는 우리의 많은 것이 남아 있습니다. 친구들, 교회, 자주 가던 마트, 식당 그리고 11년 동안 우리 집을 지켜주던 태풍이도 그곳에 있습니다. 우리를 눈물로 보내주었던 그분들께 우리가 멀리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싶고 지치지 말고 계속 믿음의 삶을 살자고 격려하고 싶습니다.

기도편지는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습니다. 우리는 또 언젠가 하나님이 우릴 부르셔서 카자흐스탄에서 살수 있는 기회를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가 되면 다시 알마티에서 보내는 편지를 이전 수신자들에게 발송할 거라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지금은 언제나 그랬듯이 그 분이 이끄시는 또다른 모험에 나서야 할 시간입니다. 장소만 한국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동안 한 마음으로 저희 여정을 함께 해 주셨던 동역자님께 마지막 인사 드립니다. 12년... 돌아보니 긴 시간이었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하나님이 다 갚아 주시길 기도합니다.

 

2022.12.17 성탄을 앞두고

이성훈, 이선화, 형민, 시은, 성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