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티에서 보내는 편지 - 2014년 12월 (31호)

 

한국에도 눈이 많이 오고 춥다지요?  2014년 끝자락에서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맘으로 이곳 소식을 동역자님께 전합니다. 어김없이 찾아온 눈과 얼음 세상에서 오늘도 이 땅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목도하는 증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에 계시면서 저희 가정과 함께 이 땅을 섬겨주시는 기도의 용사님께 이곳 상황을 스케치해 드립니다.

겨울 알마티

 카작의 겨울은 춥고 혹독해서 마치 모두가 숨 죽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2011년 처음 맞은 알마티 겨울은 영하 25도를 밑돌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젠 이곳 추위에 적응이 되면서 매년 겨울마다 부어 주시는 새로운 은혜를 기다립니다.   

이 길이 매일 아침마다 아이들을 태우고 학교로 가는 길입니다. 눈이 일부 녹으면서 금새 빙판길로 변해 버리기에 늘 조마조마한 맘으로 기도하며 지나다니는 길이지요.   

 노란 선으로 표시된 구역이 구글어스에 표시된 알마티 경계입니다. 최근 알마티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계가 확장되었지만 여전히 노란 선 안이 전통적 알마티 지역으로 통합니다. 저희 집은 알마티의 서쪽 경계에 위치하고 있고 아이들 학교는 서쪽으로 더 20Km 정도 산길을 따라 가야 합니다. 보라색으로 표시된 두 지역은 저희 가정이 함께 이루고 있는 교회 공동체의 위치입니다. 주일에는 으르겔리에서 모이고 금요기도회와 토요여성모임은 샹으락 지역에서 모입니다. 주일 예배 장소가 다룬 이유는 일전에 말씀드린대로 우리 모임은 아직 미등록 종교기관이기에 1년 전, 현지 검찰의 불시 방문 이후 보안상의 이유로 다른 곳으로 급히 장소를 옮겨야 했습니다. 부룬다이 교회는 의료활동 때문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지역입니다.  그러고보면 우리 가정의 활동 영역은 주로 알마티 시 바깥인 셈입니다.

 저희 집 주변인 알마티 서쪽 경계 지역입니다. 알마티는 4-5천 미터 산봉우리들이 남쪽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데 겨울이 되면 난방으로 사용되는 갈탄과 자동차 매연으로 인해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스모그에 몸살을 앓습니다.

교회 이야기

 카자흐스탄은 1991년도에 소련에서 독립한 나라입니다. 카자흐스탄 ㅅㄱ 역사 30년을 돌이켜 보면 10년 단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독립 직후 10여년간(90년대)은 카자흐스탄 ㅅㄱ의 부흥기였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했던 이 시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외부에서 전해진 복음에 반응했고 쉽게 마음 문을 열고 여기저기에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카자흐스탄 경제 성장과 함께 한 10년(2000년대)은 ㅅㄱ 활동의 정체기로 볼수 있고 이후 10년인 현재(2010년대)는 ㅅㄱ 활동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배경으로는 2010년 신 비자법, 2011년 신 종교법의 시행으로 현실적으로 ㅅㄱ 활동이 힘들어졌고 외국인 ㅅㄱ사 비자의 발급 및 연장을 불허한 점, 종교기관 재등록법을 통해 개인의 종교활동이라 하더라도 지정된 종교기관 안에서만 가능하도록 제한하고 기존 교회 재등록을 어렵게 만든 규정들이 손에 꼽힙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지금이 카자흐스탄 ㅅㄱ 역사 중 가장 어려운 시기라는 점에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보이는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이 때를 하늘 아버지께서 예정하신 '그 때' 로 봅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 특별한 시기는 카자흐스탄 교회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광야의 길이자 축복의 길로 여겨집니다. 자의든 타의든 이젠 외국인 사역자가 공식적으로 현지 교회를 리더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외부 ㅅㄱ사나 외부 재정지원에 의존하는 교회가 아니라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만 높이고 예배하길 원하는, 세상과 구별되는 원하는, 현지인 중심의 자립 교회로 준비시키는 하늘 아버지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시대입니다.  

 샹으락 교회의 금요기도회 모습입니다. 성장하고 있는 카작인 교회를 찾기 어렵다는 시대지만 여전히 카작인들을 사랑하시고 부르시는 아버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임에서는 이 지역의 공용어 격인 러시아어를 사용하지 않고 카작 민족어인 카작어를 사용하며 예배합니다. 초기에 ㅅㄱ사들이 카자흐스탄에 들어왔을 때 사용한 성경은 러시아어 성경이었고, '이수스 크리스토스(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1,000년된 러시아 정교회에서 듣던 것과 똑같은 단어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슬람교가 정체성이었던 카작 민족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러시아인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였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카작 민족을 팔아넘기는 배신자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곳에 모인 카작인들은 카작어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기존 카작인들의 선입관과 편견을 부정합니다.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도 러시아어의 '보그' 가 아니라 카작인의 정서를 반영한 그들의 언어 '쿠다이'입니다. 카작어 성경이 완전 번역된 것은 겨우 3년 전의 일입니다. 이제 그들 말로 된 성경으로 그들의 문화와 정서 속에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밤 11시가 넘어가면 기도회는 3-4명씩 개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하는 시간으로 넘어가는데, 8시 정도에 시작한 모임은 자정 넘어서까지 말씀을 나누고 기도와 찬양하는 시간으로 드려집니다.

 우측 사진은 우리 교회의 리더 모임 모습입니다. 우리는 아직 교회 조직이 없습니다. 당회도, 집사 직분도 없고 그저 5-6명의 현지 리더와 외국인 사역자가 함께 모여 향후 방향을 설정하고 나아갑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철저하게 현지인 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의사 결정을 하도록 하고 우리는 그들의 얘기를 듣고 기다립니다. 현재 전임 사역자로 루스템을 세우고 목사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지만 한국식으로 생각하면 우스울 수도 있습니다. 그는 정작 1년제 무허가 신학교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 카자흐스탄에는 신학교가 정식 허가되지 않고 있어서 향후 카작 교회의 미래를 끌고갈 현지인 사역자들이 이 나라 정부가 종교 기관에게 요구하는 '정식 종교 교육을 받은 자' 로 양성될 기회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별로 무허가 신학교를 자체 운영하거나 공동체 안에서 도제식으로 말씀 전하는 것을 가르쳐 말씀 사역자로 세웁니다.  

 주일 예배는 으르겔리의 종교기관으로 등록된 건물을 2시간 정도 장소만 빌려 그 곳에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알마티 북쪽 50-70Km에서 금새 서 버릴 것 같은 찌그러진 구식 버스를 타고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사는 곳 주변에는 신앙 공동체가 없고, 카작어로 말씀을 듣고 싶어 찾아오는 사람들입니다. 이 날도 남편에게 버림받고 길바닥으로 내몰린 한 아주머니와 아이들이 우리 교회로 찾아왔습니다. 극심한 가난과 사회적 편견 때문에 이 세상에 소망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교회로 찾아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출발

 지난 번 기도편지를 통해 하늘 아버지께서 안식년 이후 의료 사역의 길을 먼저 열어가셨음을 나눴습니다. 이것은 우리 가정이 2010년 사역지로 나올 때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고 조금도 예상못했던 길입니다. 우리 교회의 카작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다."인데 카작 땅에서 살면서 그 하나님을 제 인생에서 계속 만나고 있습니다. 내 생각과 계산과는 전혀 다르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좌측이 바로 새해부터 일하게 될 현지 의료기관인 '도스타르메드' 입구입니다. 카자흐스탄의 의료 수준은 임상 경험과 설비 운영 수준에 있어 한국보다 한 세대(30년) 정도 뒤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의료라는 것은 노동집약적 산업이기에 외국 의사 한 사람이 온다 하더라도 정작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은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하늘 아버지께서 하실 일이 더 기대됩니다.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는대로 저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내맡겨드리기 원합니다. 우측 사진은 영주권 관련 접수와 심사가 끝난 뒤 발급되는 확인증인데 통상 수령 후 1달 뒤 영주권(거주권)이 발부됩니다. 발행 날짜가 2014년 12월 2일로 되어 있으니 한 달 후인 1월 초에 영주권을 취득하게 됩니다. 역시나 예상한 대로 심사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정말 기적적으로 지난 12월 2일 확인증이 발부되었습니다. 저는 2014년 1월에 카자흐스탄 소화기의사 자격을 취득했기에 영주권을 받는대로 도스타르메드에서 바로 진료를 시작하기로 얘기된 상태입니다.

 안식년 후에도 지난 2년간처럼 정기적으로 부룬다이 지역을 방문해서 교인은 물론 인근 지역민을 대상으로 진료를 하고 있습니다. 부룬다이 교회의 담임 사역자는 우즈벡스탄에서 넘어온 러시아인 청년 '바실리'입니다. 젊은 시절 가라데 선수이기도 했던 그는 복음의 능력으로 어두웠던 시간들을 떨쳐 버리고 이제는 알마티 외곽 마을에서 전도사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그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의 결혼식에도 참석했고 첫 아이의 출생과 돌잔치는 물론 크고 작은 일까지 연락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고 있습니다. 며칠 전 바실리 전도사의 목사 안수식이 알마티 시내의 A 교회에서 열렸습니다. 알마티에는 90년대 부흥기에 설립되어 일찍 뿌리를 내린 몇몇 교회들만이 등록교회로 남아 있습니다. 이 중에는 살렘교회, 알마티 은혜교회 같은 큰 교회도 있고 A 교회처럼 비인가이지만 자체 신학교를 열고 현지 사역자들을 양성하고 있는 교회도 3-4군데 있습니다. 바실리는 이 곳에서 훈련을 받고 이제 정식 목사로 삶을 드리게 됩니다. 카자흐스탄에서 목회자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바실리와 그의 아내 비까(빅토리아)의 모습이 큰 은혜와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가족 이야기

 아이들은 추위 속에서도 이곳 MK 학교인 텐샨학교 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이곳 학생의 90%가 ㅅㄱ사 자녀이고 그외 신앙을 가진 비즈니스 가정 자녀도 있습니다. 1995년 알마티의 몇몇 사역자 가정이 한 아파트에 모여 공부하게 되면서 시작된 텐샨학교는, 현재 카작 교육부에는 정규 학교로 등록되지 않아 카작 학생은 공부할 수 없습니다.(이는 보안상으로도 매우 중요합니다) 지난 2002년 카작 경제부에 텐샨 교육센터로 등록되었고 지난 2012년 1월, 새 건물로 이사를 왔는데 현재 총 학생 수가 유치원부터 12학년(고3)까지 합쳐 140명 정도 되는 작은 학교입니다.

 현재 이선화 M은 이곳에서 7-12학년 담당 행정업무를 맡고 있고 간혹 한국어 수업도 합니다. 일주일에 4일 정도 학교에 가는데 매일 아침 6시, 본인 포함 세 아이의 도시락 싸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지요. (한국의 학교 급식이 너무 부럽답니다.) 텐샨학교는 특별한 단체나 개인 소유가 아니라 사역자로만 구성된 학부모회에서 운영을 맡고 있다보니 이렇게 각 가정의 도움이 있어야만 학교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축구를 사랑하는 6학년 시은이는 요즘 사춘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게 느껴지는데 그래도 사랑스럽습니다. 매일 밤 자기전에 윗몸 일으키기 55개씩 하고 잠자리에 들지요. 5학년 성은이는 언니, 오빠 처럼 키가 쑥 자라지 않는데 아무래도 많이 안 먹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 집 분위기 메이커로 늘 기쁘고 즐겁습니다. 아이들 모두 카작어로 모임이 진행되는 카작교회 공동체에 있다보니 언어 문제로 교회를 통해 영적 공급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텐샨학교에서는 러시아어를 배우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학교와 가정을 통해 부족한 부분들을 메워가고 있습니다.

 8학년인 형민이의 경우는 텐샨학교 학생들이 으레 그렇듯이 스포츠 활동으로 바쁘게 지냅니다. 이번 가을, 텐샨학교 senior 축구팀은 알마티시 학교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고 얼마 전 타쉬켄트에서 열린 중앙아시아 축구대회(CASC) 에서는 하루에 3경기를 뛰어야 하는 일정 속에서 형민이와 팀 동료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도 하고 돌아왔습니다. 우측 사진에서 서서 기도하는 이가 형민이 모습입니다. "그건 우리가 한 게 아니었어요. 바로 하나님이셨어요." 더 이상 뛸 수 없는 체력 속에서 말씀 묵상을 하며 찬양을 부르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한 아이들은 30분 쉬고 임한 연속 경기에서 바로 앞 예선에서 0-2 으로 진 팀에게 3-0 이겨 결승에 진출합니다. 아이들의 간증을 들으며 하늘 아버지의 만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우리는 매주 금요일 샹으락 성경공부 및 기도모임, 매주 토요일 샹으락 교회 여성 모임, 매주 예배를 위한 찬양팀 연습, 저희가 속해 있는 단체(I*S*) 관련 모임들로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 삶은 우리의 예상과 의지를 뛰어 넘은 곳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예비해 두신 아버지의 섭리들이 발견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주님만 계속 바라보며 이 길을 따라가는 것 뿐입니다.

 

[ 기도 제목 ]

1. 한 해를 돌아보며 가진 샹으락교회 리더 모임에서는 양육 프로그램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 기도를 드린 사람들의 수는 많은데 아직 교회 내에 체계적인 양육 과정이 부족하다는 반성들이 나왔습니다. 앞으로는 결신자가 나오면 사역자와의 식사 시간, 4주 기초 교리공부를 따로 진행하자고 결론이 났습니다. 그러나 120년 넘는 개신교 역사를 가진 한국에서 온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이나 시스템 만으로는 새로 태어난 믿음이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교회 구성원 모두가 첫 사랑을 잊어 버리지 않고 세상 가치관을 거부하며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며 함께 자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믿음의 시작이요 완성이신 주님 안에 매일 거하고 그 분만을 바라보도록 기도해 주세요.  

2. 현지 행정 업무를 하다보면 모든 일이 완료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1월 초에 나올 예정인 영주권이 아무 차질없이 발급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지난 3년간은 한국 의대졸업장에 대한 국가 인증, 이를 바탕으로 특정 의료기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노동 허가(work permission), 그리고 발급된 외국인 노동 허가에 따른 노동 비자로써 이 나라에 머물며 특정 병원에서 진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주권이 발급된 뒤에는 외국인 신분이 아니라 특별한 노동허가 없이도 일할 수 있는 자국민과 동등한 신분으로 이미 획득한 현지 의사 자격증을 가지고 어디서든지 의료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 이 땅과 사람들 맘 속으로 흐르는데 사용되길 기도합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언어 소통도 완벽하지 않고 한국과 같지 않은 의료 환경이지만 그 분이 주시는 사랑과 지혜로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해 주세요.

3. 바실리 전도사가 목사 안수를 받던 그 날, 회중 앞에 선 바실리와 빅토리아를 바라보는 제 맘은 감사의 맘과 애틋한 맘이 함께 밀려 왔습니다. 아내 빅토리아는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겠지요. 하지만 이 카자흐스탄 땅에서 날마다 하늘 만나를 의지하며 세상을 거슬러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실리 목사님은 앞으로 부룬다이에서 목회를 계속 하게 됩니다. 카자흐스탄에 세워진 또 한 명의 현지 목사님, 바실리 목사가 날마다 성령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 하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이기고 교회를 잘 섬기도록 기도해 주세요.

4. 2014년을 보내면서 저희 가정이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도우시고 기도해주신 후원자님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저희는 우리를 이곳으로 보내신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기에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함께 카작을 섬기시는 동역자님의 삶 속에서도 저희와 동일한 기쁨과 은혜가 새해에도 넘쳐나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동역자님의 기도와 후원으로 우리가 이곳에서 사역합니다. (기도편지는 항상 짝수달 15일 즈음에 발송됩니다. )

이성훈, 이선화, 형민, 시은, 성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