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티에서 보내는 편지 - 2014년 10월 (30호)
지난 주에 첫 눈이 내렸습니다. 4-5천 미터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서 있는 알마티에서는 한여름에도 항상 만년설을 볼 수 있지만, 올해는 예년보다 빨리 메마른 도시에 흰 눈이 내렸습니다. 4년만에 맞은 안식년을 끝내고 돌아온 이 곳에서, 새로운 마음과 각오로 동역자님께 감사로 문안드립니다.
10주 동안의 안식년
2010년 6월 파송을 받은지 4년만에 맞는 안식년이지만 현지 클리닉 사정으로 1년이 아닌 2달 남짓의 안식년을 계획해야 했습니다. 예측 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삶에 지친 탓인지 우리 스스로도 재충전이 절실함을 느끼고 있던 바로 그 시점이었지요.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것 자체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회복제였습니다. 내 조국, 내 땅에서 사는게 얼마나 좋은지요^^. 가장 크게 와 닿은 것이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이었습니다. 대도시 한복판이라 하더라도 이곳과 비길수 없는 맑은 공기였습니다.
알마티에서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치열한 투쟁의 연속이기에 이민국이나 비자, 감시의 눈초리 없는 내 조국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에겐 이미 충분했습니다. 거칠고 누렇게 그을린 얼굴도 1주 만에 엄청 좋아졌고 크고 작은 질병이나 증상들도 금새 사라지고 말았죠. 오랜 시간동안 볼 수 없었던 손자,손녀를 보고 기뻐하시는 부모님의 얼굴에도 모처럼 웃음꽃이 피셨습니다.
가족과의 시간을 보낸 후 이랜드 산하 아시안미션에서 주최하는 안식년 ㅅㄱ사를 위한 R&R 캠프를 시작으로 파송 교회, 단체, 후원자들을 차례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긴 시간동안 얼굴을 대하지 못했던 파송교회와 기관에서 1달 간 함께 지내며 우리 안에서 아버지께서 얼마나 신실하게 일하시는지 생생하게 볼 수 있었고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선린병원에서 저희 가족을 재파송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을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알마티로의 귀국을 보름 남겨둔 시점에서 대구 동산의료원 직원선교회로부터 7월 말일자로 알마티 동산병원에서의 제 사역을 종료한다는 통보를 받으면서 이 길로 들어선 이래 가장 큰 위기를 맞아야 했습니다. 카자흐스탄 현지의 경제사회적 변화와 의료 ㅅㄱ에 대한 서로의 생각 차이로 이런 결정이 내려질 수밖에 없었지만 이로 인해 동산의료원의 후원 중단과 함께 우리가 가진 카자흐스탄 비자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그 날 밤, 우리와 왜 알마티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서로 진지하게 묻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 앞에서 우리가 그 곳에 가야하는 이유를 확실히 발견할 수 있었고 우리 가정의 진로를 재정이나 눈에 보이는 상황이 아닌, 믿음으로 내딛는 걸음에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그 이후로 우리가 이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여러 교회와 개인 후원자분들과 연결되면서 아버지께서 우리를 계속 이 땅으로 보내길 원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경험인지요.
충진교회에서의 재파송식 모습입니다. 2010년 첫 파송예배를 드릴 때는 '감격'과 '기대'가 컸다면 이번 파송식은 이전과 다른 '은혜'와 '결단'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다시 밟아야 그 땅에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음성을 듣고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는 것 외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영적 전투의 현장으로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돌아보면 파송교회인 충진교회 공동체로부터 받은 사랑과 격려 덕택에 외롭지 않게 이 길을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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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린병원의 재파송 결정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였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재파송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는데 제가 병원을 방문하기 전 날, 이사장이 교체되었고 지난 3년간 병원 내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흐름이 생기면서 저희 가족을 재파송하는 것으로 전격 결정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 땅으로 보내신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부산의대기독학생회 선후배를 포함한 여러 개인후원자들의 헌신은 동산의료원 사태 이후로도 우리가 이 길을 계속 걸을 수 있도록 지탱해주었습니다. 학창 시절 주 안에서 함께 꿈과 희망을 나눴던 학생들은 이제 결혼해서 아이를 기르며,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한 가정을 파송하고 있습니다.
알마티로 떠나오기 전날까지 가능한 한 사람의 후원자라도 더 만나려고 애썼습니다. 성민교ㅎ, 광려교ㅎ, 남산교ㅎ, 하나가정교ㅎ 등에서 카자흐 민족과 알마티 상황을 나눌 기회도 있었는데 이 과정을 통해 우리 가정 역시 새롭게 결단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8월 29일 알마티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돌아온 알마티에서
아이들은 카자흐스탄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집도, 친구도 알마티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선화 M 은 얘기합니다. "자칫 조금만 더 머물렀으면 한국에서 살고 싶어질 것 같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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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교ㅎ의 많은 지체들이 우리 가정을 반겨주었습니다. 2달 반이라도 이들에겐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나 봅니다. 지난 10월 6일에는 우리가 섬기는 샹으락 교회 설립 5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처음 세 가정이 시작한 이 작은 공동체는 이제 어른만 40명이 넘는 카작 교회로서는 보기 드문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은 이 공동체 안에서 지난 3년간 한 몸으로 자라왔습니다. 이번에 한국에 나가 많은 성도들 앞에서 나누었던 현지 교회가 바로 이곳입니다. 카자흐스탄 주류 민족인 카자흐 민족의 복음화율이 1% 도 안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지금 이곳에서 만나고 섬기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이 땅 교회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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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말에는 지난 3년 동안 찬양팀으로 함께 섬기고 있는 '굴루루'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굴루루는 5년 전 언니 결혼식때 탑승했던 차량의 교통사고로 죽을 뻔하다 살아난 자매입니다. 하지 다발성 골절과 안면 함몰로 인해 지금도 한쪽 눈이 없어 밤에도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지만 그녀는 '그 때의 사건이 없었다면 내가 예ㅅ님을 믿을 수 있었을까?' 라며 그 때 일을 회상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자매입니다.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생명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지요. 좌측이 이선화 M과 굴루루가 안고 축하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굴루루가 그녀의 삶에 일하신 아버지를 계속 찬양하며 성장하길 기도합니다.
의료 사역
안식년 기간 동안 동산의료원과의 관계가 정리되면서 향후 의료사역에 관한 질문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제가 보는 관점에서는 이러한 변화는 현지 의료 사회로 들어가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더 유리합니다. 현지 병원에서 더 많은 현지 의사들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난 3년간의 시간은 현지 의료체계를 다시 익히고 현지 면허를 취득하는데 필요한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단계의 사역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와서 새 의료기관을 물색할 즈음, 주카자흐스탄 한국대사관으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지난 5월, 총영사 관저에서 열린 현지 의료기관 대표자 초청 모임이 있었는데 한국 교민 응급상황에 대한 논의와 고려인 의료 사회와의 협력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지요.) 그런데 그 후속 조치로 알마티 최고수준의 병원인 도스타르메드와 대사관이 의료협력에 관한 샹호양해각서를 추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아버지께서 앞서 일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지요. 이를 계기로 도스따르메드에서 의료사역을 펼칠수 있는 길이 자연스럽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지난 9월 25일, 주카자흐스탄 한국대사관 알마티 총영사와 도스따르메드 회장이 상호 양해 각서를 주고받는 모습입니다. (왼쪽부터 도스따르메드 지사장, 도스따르메드 본원 원장, 통역, 한국 대사관 영사, 총영사, 도스따르메드 회장, 사장, 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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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해각서 아래에는 도스따르메드 원장, 대사관 알마티분관 총영사, 그리고 제가 사인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각서의 실질적 내용은 도스따르메드에서 한국인 의사가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두 기관에서 돕겠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현지 의료기관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아 지금까지 해오던 현지 교ㅎ와 사역자를 돕는 사역을 지속함은 물론 더 많은 알마티 현지인들을 현지 최고 수준의 의료환경 속에서 만나도록 새 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더 놀라운 소식도 있습니다. 그것은 저희 부부가 카자흐스탄 거주권(영주권과 유사) 신청 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안식년으로 한국에 가 있는 동안 이제 더이상 알마티 동산병원의 워크비자를 받을 수 없기에, 알마티에 한국 모 기업의 카자흐스탄 지사를 여는 형식으로 비자를 해결하려고 모든 준비를 갖춰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불과 한 달만에 우리의 예상과 달리 아버지께서 앞서 일하셨고 놀라운 방법으로 영주권을 취득하는 쪽으로 일이 급격하게 기울게 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도움과 시의적절한 만남으로 모든 문제가 일사천리로 해결되어 지난 10월 9일, 관련 서류를 담당자에게 넘겼고 앞으로 3개월 후 거주권(영주권)을 받을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지요.
이렇게 되면 영주권을 가진 상태에서 현지 의사면허를 보유하고 있기에, 외국인 의사의 신분으로 매년 비자를 연장해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 의사와 똑같은 법적 지위로 이 나라에서 머물며 사역할 수 있게 됩니다. 지난 한 달동안 매일 아침마다 말씀으로 정확하게 가르쳐주시고 사람들을 보내주신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새로 시작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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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이곳 MK 학교가 개학하고 2주가 지나서야 늦게 알마티로 돌아왔지만 아이들은 금새 이곳 생활에 적응했습니다. 이선화 M은 올해는 1주일에 4일간 MK 학교에서 업무를 돕게 되어 이전보다 더 바빠졌습니다. 형민이는 8학년, 시은이는 6학년, 성은이는 5학년입니다. 형민이가 말합니다. "올 여름이 내 생애 최고의 여름이었어요." 한국에서 고국의 아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 그렇게 가슴 깊게 남고 좋았나 봅니다. 그토록 좋은 기억을 안겨주신 고국의 교ㅎ와 후원자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있어야 할 곳은 카자흐스탄이기에 이제 받은 사랑을 이곳 아이들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지난 3년간 자동차 때문에 애도 많이 태웠는데 보내주신 헌금을 보태어 새 차를 마련했습니다. 쌍용 자동차 '악티온' 입니다. 찾아보니까 한국에는 코란도C 라고 불리는 차라고 하네요^^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형민이는 9월부터 10월 중순까지 학교대항 축구 리그에 참여하느라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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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와보니 여름이었는데 한 달만에 겨울로 이동했습니다. 지난 주에는 첫 눈도 내렸습니다. 오빠 축구시합 보러 갔다가 눈밭에 서게 된 시은이도 올 여름 사이에 키가 부쩍 컸습니다.
2달 반의 짧은 한국 방문 기간동안 하나님 안에서 사람들을 통해 주시는 위로와 격려가 얼마나 큰지를 경험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함께 서 있어 주시고 함께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우리는 새 사역주기를 위로부터 주시는 강력한 새 힘 충만함 가운데 출발합니다. 고맙습니다.
[ 기도 제목 ]
1. 올 여름 한국 사역자들이 모두 한국에 나가 있는 동안 샹으락 교회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모임이 자기 건물이 없고 등록되어 있지 않은 지하교회이기에 이것을 해결해 보자는 의견이 여기저기서 많이 나왔었나 봅니다. 우리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 분을 머리로 해서 하나된 공동체임을 믿습니다. 이제 만 5주년을 맞는 샹으락 모임이 건물이나 세상의 평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한 분, 아버지만을 최우선으로 섬기는, 살아있는 참 믿음의 공동체가 되길 기도합니다. 루스템, 루슬란, 세륵, 셉둘라, 파리다 이렇게 5명의 리더들이 세상의 가치관에 오염되지 않고 계속 좁은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샹으락 교회가 가진 그 특유의 운동성, 알마티 수십 Km 밖에서도 복음을 들으러 찾아오고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찾아가는 전도자의 영성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아울러 우리 가정 역시 외국인 사역자로서, 이들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을 감지하고 온전히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2. 거주권(영주권)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알마티 동산병원 업무를 정리하는 작업과 도스따르메드 관계자들을 만나는 일 등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해왔던 알마티 외곽 교회(부루다이 등) 이동 진료사역을 위해서도 바실리 목사님과 만나 향후 계획을 의논하는 등 안식년 후 새로 시작될 의료 사역 준비로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토대를 다졌던 지난 4년을 지나 앞으로 4년도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시간이 되도록 기도해 주세요.
3. 안식년 기간 동안 예상치 못한 일을 겪으면서 새로운 개인후원자와 교회를 만나기 위해 열심히 뛰어 다녔습니다. 지난 2010년 파송 이후 이렇게 적극적으로 많은 분들을 만나고 동역을 부탁드린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카자흐 민족 교ㅎ 상황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해 주셨고 저희 가정과 함께 알마티에서 후원하며 사역하겠다고 다짐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도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그 분이 지시하시는대로 이 땅과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동역자님의 기도와 후원으로 우리가 이곳에서 사역합니다.
이성훈, 이선화, 형민, 시은, 성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