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진 내시경...거리에 나선 의사들...

 

소화기 내과 의사들은 다른 내과 의사들보다 더 부담스러운 일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야간에 응급 내시경 시술을 시행하는 것입니다. 식도 정맥류 출혈이나 위궤양이나 십이지장 궤양 출혈로 피를 토하면서 응급실에 도착하는 환자들에게는 출혈하는 부위를 정확히 찾아 지혈 치료를 할 수만 있다면 이 보다 더할 나위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혈압이 떨어지고 의식이 처진 환자의 경우 무조건 내시경실로 데리고 가서 내시경을 입 속으로 넣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내시경 시술 도중 발생할 수 있는 흡입 등에 의한 질식사의 가능성이 높아 지므로 이런 환자는 응급 내시경의 적응이 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내시경의 금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협조가 되지 않는 환자입니다.

그 날도 전 야간에 응급 내시경 시술 당번이었습니다. 물론 전공의가 혼자 시술하지 않습니다. 치료 내시경의 경우 반드시 전문의와 함께 시술을 하게 되어 있고 다른 전임의 선생님이 함께 호출되었습니다.

밤 12시가 넘어 내시경실에 올라 온 환자의 모습을 보니 협조가 되지 않는 환자였습니다. 간경변증에 간성 뇌증이 겹쳐 아무 말도 알아 듣지 못하면서 연신 피를 토하고 있었습니다. 우린 함께 고민하다 일단 출혈 부위라도 알아 보기로 하고 내시경을 시작했습니다.

내시경을 시행할 때 입속으로 들어가는 내시경을 보호하기 위해 입에 물리는 기구가 있습니다. 우린 이것을 마우스 피스(mouth piece)라고 부르는데 혹 환자가 입속에 있는 내시경을 물지 않도록 하기 위한 보호 장치인 셈이죠.....내시경은 일본의 올림퍼스와 미국의 펜탁스에서만 현재 국내에 반입되고 있는데 내시경 1대 가격은 약 6-7천만원(fiber만) 가량 된다고 합니다. 비교적 고가인 이 장비의 보호를 위해 우린 마우스 피스 만으로도 불안해 직접 마우스 피스를 잡고 있습니다.  만일에 대비해서죠...

내시경 시야에 혈관이 노출된 정맥류가 보이고 있고 그 곳에서 계속 출혈하고 있는 것이 내시경 모니터에 보였습니다. 정확한 검사를 위해 내시경을 시행하는 도중에는 위 내를 부풀리기 위해 공기도 넣고 병변을 씻기 위해 물을 넣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환자는 시술에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잘 못 참고.....제 정신도 아닌지라 손을 흔들고 입에 들어 있는 마우스 피스를 빼내려고 힘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의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판단입니다. 이 상황에서 계속 하든지...포기하고 내일까지 기다려 다시 시도하든지.... 아마 이 판단이 빨리 서지 못했나 봅니다. 내시경을 직접 잡고 있었던 전임의 선생님은 출혈하고 있는 부위를 고무링으로 결찰하기 위해 이리 저리 내시경을 움직이고 있었고......환자의 고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많은 사람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없는 환자는 입에 있는 마우스 피스를 뽑아 버리고 내시경을 물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아저씨,,,,아저씨....입을 벌리세요.....아저씨!!" 외침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억지로 입 안에서 내시경을 꺼낸 뒤 우린 물린 자국이 선명한 내시경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비싼 기계라는 걱정도 있었집만 이 한 밤중에 의식 없는 환자와 씨름 한 뒤 우리가 얻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에 대한 허탈감이 밀려 왔습니다.

다음 날입니다. 내시경 실에는 수리나 보수 중인 내시경이 많습니다. 그래서 항상 내시경 관리라고 하면....모든 교수님들이 민감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이지요.......교수님은 화가 많이 나신 모양입니다. 일단 내시경의 금기 사항인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 내시경을 시행하다 물린 부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사실 밤에 누가 자다 나와서 내시경 하는 걸 좋아 하겠습니까? 환자가 안 됐고 담당 선생님의 부탁에 내시경 의사도 무리하는 줄 알면서 시도하다가 빚은 사고인데...... 내시경 실 분위기는 하루종일 좋지 않았습니다. 사태 수습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채 하루가 흘렀고 그 날 밤 전 또 응급 내시경 호출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또 .bleeding(출혈)인데요..."

"뭐 같애요?"

"ulcler bleeding(궤양 출혈) 같습니다."

"예, 제가 좀 있다 다시 연락드리죠..."

전임의 선생님과 연락 후 우린 내시경을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내시경 실에 도착한 후 바라 본 환자는 조용해 보였고 별 문제가 생길 것 같아 보이진 않았습니다.  내시경 시술을 시작되었습니다. 역시 궤양 출혈임에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위 내에 피가 가득차 있어 혹 다른 병변이 없나 살펴보는 순간...........환자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온 몸을 움직이며 내시경을 빼려고 했습니다.

우린 10명 정도가 달라 붙었는데 머리를 이리 저리 흔들며 손을 입에 대는 걸 막을 수 없었고 급히 내시경을 빼다 내시경 첨단부가 다시 물렸습니다. 첨단부에는 렌즈가 부착되어 있어서 더욱 치명적인 손상이 오는 부위인데...............

시술자도 어제에 이어 똑 같은 사고가 발생하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습니다. 시간은 밤 1시가 넘었는데........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몇 년간 이런 일은 없었는데.....주섬 주섬 주위를 챙겨 병원을 빠져 나왔습니다. 이 날은 설날 연휴 첫 날이었습니다.

설날 연휴 동안 응급 내시경은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연휴가 마치고 내시경실에서는 큰 소리가 오고 갔습니다. 역시 과연 내시경을 할 정도로 급했냐는 것과 환자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왜 바로 내시경을 그만 두지 않았느냐가  문제의 초점이었습니다.

얘기 끝에 두 번째 내시경의 수리비는 시술자와 담당의가 알아서 충당하라는 얘기가 소화기 내과장의 입에서 떨어졌습니다. 수리비?........약 6백만원 정도 든답니다.........시술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담당의는 대개 놀랐나 봅니다.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작 내시경을 문 환자에게는 기계를 못 쓰게 만들어 났으니  배상하라고 책임을 묻지 못하고 시술자와 담당의의 죄목만 묻습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다른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애쓰다가 자신의 몇 개월 봉급을 다 날려야 하는 슬픈 우리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물론 앞으로 일이 어떻게 매듭지어 질지 모르지만 오래되어 작동이 어려운 내시경 수리비도 부담하지 않으려는 병원측을 상대로 설득하는데 지친 내시경실은 담당의와 시술의.......심지어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그 책임을 묻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요즘 내시경실의 분위기는 우울합니다.

내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의사들의  완전 의약 분업 실현 및 의료 수가 정상화를 위한 집회가 있습니다. 전국의 의사들이 모두 모이게 됩니다. 부산대학병원 내과 의국에서도 10여명이 상경하게 됩니다. 다른 과에서도 올라갑니다. 다른 말은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의 환자들과 자신의  일을 던져 두고 무리해서라도 그렇게 모이는 것이 단순히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서 일까요? 의과대학 6년,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 군 3년 3개월 후....자신의 소신 대로 환자를 열심히 볼 수 없는 사회 현실이 눈 앞에 닥쳐 온 것에 가만히 뒷짐지고 있을 젊은 의사가 몇이나 될까요... 의사는 자신의 앞에 앉은 환자가 내게 돈을 벌 게 해 주는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하게 되면.....이미 ....그는 재미없고 피곤하기만 한  보람없는 삶의 길로 접어들게 되고 맙니다. 자신의 일에 만족하며 최선을 다해 환자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의사가 이 사회에서 계속 유지되기를 이 사회는 과연 원하고 있는지?..........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밤잠을 설치는 우리들에게는 이 사회가 왜 이렇게 합리적으로 일이 처리하지 않는지 답답할 뿐입니다. 의사 처방없이 약국에서 임의로 팔 수 있는 일반 의약품의 품목은 선진국에 비해 2배가 넘는 비율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동료들은 내일 새벽 6시에 병원에 모여 서울에 올라갑니다. 약물 오남용을 막기 위해 시행한다는 의약 분업은 정작 약물 오남용의 주된 원인을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약물 오남용의 온상이 약국에서 의사 처방없이 임의로 판매되는 수많은 의약품이 일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지..........

전 S상 대장 검사를 시행합니다. 항문을 통해 내시경을 넣고  대장암이 가장 많이 생기는 직장과 S상 결장을 관찰하는 거지요....때로는 제대로 관장이 되어 있지 않아 똥물이 튀기도 하지만 혹시나 병변을 놓치지는 않을까 주의 깊게 보고 U 턴을 해 봅니다. 이 검사의 수가는 5천원입니다.

내일 올라가는 많은 의사 선생님들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전 그래도 예약되어 있는 위내시경, 대장 내시경, 역행성 췌담도 촬영술, 전기수압 쇄석술 환자의 처치를 위해 1명은 남아 있기로 해 부산에 있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내일 하루종일은 제 마음도 서울에 가 있을 겁니다.  참된 의미의 완전한 의약 분업이 이루어진다는 소식이 들릴 때까지 우리 모두의 마음은 진료실 밖을 정처없이 헤맬 것 같습니다.

 

* 참고로 한국 누가회에서 밝힌 크리스챤 의사들의 의약 분업의 쟁점 사항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약사의 임의 조제가 금지되어야 하며 의사는 진료후 처방하고 약사는 처방전에 따른 조제를 시행하는 완전한 의약분업이 실시되어야 한다.

2. 현재의 턱없이 낮은 의료수가에 대한 현실화가 이루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