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나요?
1999.12.6 언제나 부담스러운 월요일 오전이었습니다......
내시경실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내가 삐삐의 진동을 느낀 때는 이제 막 내시경 검사를 마친 후 판독을 입력하려고 PACS(영상 이동 시스템) 컴퓨터 앞에 앉으려고 할 때였습니다.
낯선 번호가 들어 와 있었고 그 옆에는 음성 메시지가 들어와 있음을 알리는 [1] 이라는 부호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낮 동안 바쁘게 움직이는 내시경 실에서 외부 번호로 들어 온 전화번호에 연락해 주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특히 들어온 번호가 지금과 같이 011- 으로 시작하는 경우에는 원내 전화로는 전화가 불가능해 아예 포기해 버리죠
하지만 음성 메시지가 들어와 있길래 확인해 본 것이 그 일의 시작이었고 메시지의 내용은 "본과 4학년 학생인 기욱이의 오빠가 지금 소화기 내과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욱이는 본과 4학년의 말 그대로 신실한 기독 학생입니다. 기독학생회의 기도 모임을 인도하며 섬긴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알게 된 그 학생은 뜨겁고 간절한 심령으로 기도하고 열린 맘으로 찬송하는 기쁨을 누리며 살 줄 아는 학생입니다.
언제가 밤 늦게 동기들과 함께 찬양하다가 객원 singer로 기욱이를 불러 낼 정도로 부담이 없는 후배인데다 기독학생회의 학사 모임인 새벽별 모임도 학생의 신분으로 꾸준히 참석해서 기도하며 기독 학생회의 어려운 소식을 전하는 기도하는 귀한 자매입니다.
그런데 오빠가 이번에 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기욱이의 오빠는 1년 전에 급성 충수돌기염으로 수술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들은 선화의 말에 의하면 기욱이 오빠도 그렇게 신실하고 꾸준하게 보인다고 하더군요
다른 과도 아닌 바로 소화기 내과에 입원해 있는 기욱이 오빠를 보기 위해 6병동으로 올라갔습니다. 수심에 젖은 기욱이와 아버님, 그리고 아파서 누워 있지도 못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기욱이 오빠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배를 펴지 못하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아파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왔습니다. 반가워 하는 기욱이와 인사할 겨를도 없이 그 오빠의 통증 상태와 병력을 들었지요...
1년전 수술.....며칠 전부터 갑작스럽게 통증이 시작되고 ....열도 나고 견딜 수 없이 아프다....빨리 수술을 받았으면 좋겠다.....
내게는 특별한 정보가 없었습니다. 백혈구 22000개의 아주 심한 염증 소견이 보인다는 사실과 환자의 통증이 수술이 필요한 복막염이나 농양을 의심할 만큼 심각해 보였다는 것이 챠트와 신체적 검사 소견에서 얻을 수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때 또 알게 된 사실은 기욱이 아버님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나는 분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기도하는 사람이시고 겸손하신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분은 내게 이번에 생긴 일은 기욱이 오빠가 최근 잠시 하나님과의 교제가 멀어진 데에 대한 하나님의 연단의 일부라고 얘기하셨습니다.
2시 회진이 시작되기 전 담당 의사인 강진욱 선생님에게 연락하고 상태를 물어 보았습니다. 이전에 충수돌기염 수술을 받았기에 수술후 유착에 의한 장폐쇄나 충수돌기 주위 농양등이 의심되지만 복부 CT상에는 이같은 소견은 보이지 않고 단지 소장 벽이 부분적으로 두꺼워져 있는 소견만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20대의 젊은 환자이기에 무턱대고 개복수술을 했다가 오히려 수술이 아주 커질 수 있기 때문에 정확한 원인의 파악 없이 수술방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태이나 환자는 빨리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심한 증상을 호소하고 있고.......담당의도 아직 치료 계획이 서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담당 선생으로부터 기욱이 오빠의 복부 CT 사진을 받아 들고 형광등 불빛에 비추어 보았지만 뚜렷한 농양 같은 병변은 보이지 않고 정말 두꺼워진 장벽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회진 마친 후 오후에 담당의와 함께 다시 6병동으로 갔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하나 더 포착되었는데 이번에는 복부 초음파를 시행했는데 초음파를 시행한 의사의 말로는 농양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장벽에서 복벽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병변인 것처럼 보여 마치 Actinomycosis와 같아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Actinomycosis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수술을 하지 않는 병입니다. 항생제로 치료가 가능한 병이죠.... 빨리 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심하게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수술을 고려하고 있는 지금 Actinomycosis 라는 말은 치료 방향을 반대로 돌리는 소견이었습니다.
Actinomycosis라면 Ceftriaxone 제제나 Tienam 같은 약을 사용하면 쉽게 좋아질 수 있는 수술을 더 미룰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진 셈입니다. 하지만 조직 검사를 할 수 없는 지금 아무도 정확하게 그 병변이 Actnomycosis라고 확실하게 얘기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담당의도 답답해 하는 것은 교수님도 뭔가 뾰족한 치료 방향을 제시하지 않으시고 만일 수술이 필요하다면 빨리 해야 하므로 다시 일반 외과와 상의해 보라는 얘기만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제가 개입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6병동으로 갔습니다. 여전히 환자는 아파하고 있었고 기욱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환자의 통증 양상을 보고.... View box(필를 보는 곳) 앞으로 기욱이 아버님을 모셨습니다.
필름을 보여 드리면서 현재 수술을 하기에는 부위도 정확하지 않고 단지 염증에 의한 것이라면 항생제를 사용하면서 지켜 보는게 좋겠다는 제 의견을 말씀드렸습니다.
기욱이 아버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 생긴 일은 하나님께 주신 일인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온 식구가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보다 병원 의사를 의지하고 초조해 하는 모습이 뭔가 옳지 않은 것 같다" 고 하시면서 지금은 기욱이 오빠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큰 부흥이 일어나야 하고 시간이 더 주어져야 하기에 수술을 지금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치료 방향은 항생제를 사용하면서 추이를 지켜보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리고 또 바쁘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내과 동문 망년회로 그 날 저녁이 지나고 다음날도 내시경학회 세미나 준비로 바빴습니다.
그 다음 날....
이번에는 강진욱 선생이 내게 기욱이 오빠 얘기를 꺼냈습니다.
" 선생님.....저.... 일반외과 오남건 교수님께로 환자를 보내어 진찰을 받게 했습니다. 교수님 말씀은 장폐쇄가 심하게 온 것 같다고 빨리 수술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응급 수술을 하기로 한 상태 입니다. 아마 일반외과로 전과가 될 것 같습니다."
기욱이 오빠가 온 그 날 밤(토요일 밤), 응급실에서 일반외과 전공의가 봤을 때에도 수술이 필요할 지 모르겠다는 애매한 말을 했었고...그 동안 일반 외과에 의뢰해 보았지만 제대로 치료 방향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가 오남건 교수님이 확실하게 말씀을 해 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담당의의 말을 듣고 너무 정신이 없어 잠시 기욱이 오빠 일을 잊고 있었다는 자책감을 떨쳐 버리려는 듯 계단을 뛰어 다시 6병동으로 올라갔습니다.
통증이 좀 약해졌는지 어느 새 턱수염이 많이 자란 기욱이 오빠가 침대에 누워 있었고 아버지가 역시 옆에 앉아 계셨습니다.(역시 기욱이는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많이 지치실 텐데도 제가 황송할 정도로 겸손한 태도로 맞아 주셨습니다.
" 선생님 .... 담당 선생님에게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지만 그래도 이성훈 선생님이 얘기해 주시는 게 더 믿음이 가네요....... 수술 하라고 하는데......꼭 수술 해야 하는건가요..."
환자의 환부에 손을 가져 가 보았습니다. 분명히 이틀 전보다는 통증도 덜하고 딱딱한 부위(경결)도 줄어 들어 있었습니다. ' 항생제 효과를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장폐색 같지는 않은데.........'
아버지는 절 병원 복도로 이끄셨습니다.
수술을 좀 미루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더 일이 커져서 더 큰 수술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차피 낫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수술하지 말고 좀 더 기다려서 재영이(기욱이 오빠)가 다시 하나님과 해결할 것들을 해결하고 다시 신앙의 회복이 이루어지도록 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분명히 하나님이 낫게 해 주실 거라는 큰 믿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물론 수술로도 하나님이 낫게 해 주실 수 있으시고 수술 후에라도 재영이가 다시 신앙의 회복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아버님은 더 병이 커져 수술하더라도 재영이가 하나님께 매달려 하나님이 낫게 해 주시도록 그냥 두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 큰 믿음이 느껴졌습니다. 그 나이 연배의 남자 집사님들에게서 잘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에 대한 강한 신뢰를 소유하고 계시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 때 새로 아버님을 통해 듣게 된 사실은 기욱이 오빠는 천안 고신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신학생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제 동생 영훈이도 이번에 신학대학원 입학 시험을 보는데.............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시기 전에는 언제나 연단하시고 더 큰 믿음을 소유하게 하시고 그것을 통과한 후에야 더 큰 일을 맡기시는 하나님이시지 않으신가.....'
전 모든 의사의 소견이 수술을 하자는 쪽이지만 기욱이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 '나 같으면 이같은 환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물밀 듯 밀려왔습니다.
기욱이 아버님께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 그래.... 수술을 좀 더 연기합시다. 하나님께 더 매달리고 기도합시다."
어떻게 생각하면 부산대학병원에서 ........ 그것도 장폐색이 보여 수술하자는 일반 외과 의사의 판단 앞에서.... 이런 말을 보호자에게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께 의지해 보자는 생각이 내 맘을 더 크게 차지했습니다.
인사하고 병실 문을 나설 때...기욱이를 만났습니다. 아마 세수하고 오는 모양입니다. 늘 그렇지만 기도를 많이 했는지 눈이 좀 부어 보였습니다.
내시경실로 내려 오면서 난 '나의 행동이 바른 것인가' 라고 여러 번 생각했습니다. 기욱이 오빠의 주치의는 양웅석 교수님이십니다. 주치의는 담당의를 통해 환자 치료에 대한 계획을 제시하고 진료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수술을 하자고 결정한 분은 바로 일반 외과 오남건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결정한 양웅석 교수님이신데 ........... 내가 수술을 하지 말고 기다리자고 얘기해서 이 수술이 포기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내게 강진욱 선생은 폭탄 같은 얘길 던졌습니다.
" 선생님, 방금 김재영 환자의 복부 방사선 촬영 필름(plain abdomne X-ray)을 봤는데 air-fluid level (공기- 액체 경계)선명하게 나타는 mechanical obstruction(기계적 폐색)입니다."
air-fluid level은 기계적 폐색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소견으로 기욱이 오빠는 현재 장폐색이 진행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비록 아까 통증은 좀 줄어 든 것처럼 보여 나로금 항생제가 효과가 보는염증이라는 판단을 하게 했지만 이 방사선 소견은 그 사실을 엎는 얘기입니다.
일반 외과에서 그렇게 판단한 이유가 다 있었습니다.
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에는 하나님께서는 수술을 통해 기욱이 오빠를 낫게 해 주시고 신앙의 회복을 주실 거라고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술적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내게 일어난 상황은 그쪽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기욱이의 휴대폰으로 이 사실을 알리고 수술을 받도록 얘기했습니다. 기욱이의 실망한 듯한 힘 없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이 올바른 판단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틀 후...........
강진욱 선생이 내게 말합니다.
"선생님.....그 PK선생(본과 4학년을 지칭하는 말)의 오빠 있잖아요...."
"어때요?"
" 수술 한게 잘 한 일이었습니다. 이미 폐색이 진행되어 gangrene(괴저)이 다 와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그대로 두었더라면 심한 패혈증 소견과 함께 복막염이 심하게 와서 위험할 뻔 했습니다."
8병동에 올라 가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병재(새벽별 회장)와 함께 올라갔습니다.
저를 맞는 기욱이 아버님의 표정은 아주 밝아 보였습니다.
수술이 잘 되었다는 내 인사에 좋아 하시며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옆의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이 가야 성안교회 다니신다고 하시며 제게 소개도 하셨습니다.
기욱이 오빠는 좋아 보였습니다.
원래 수술을 한 번 하고 나면 쉽게 장유착이 오는 법입니다. 이번 경우도 이전에 시행한 충수돌기
절제술 후 장유착이 발생해 장 폐색이 진행되었고 이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농양이나 Actinomycosis
를 의심하게 했지만 결국 괴저 로까지 진행하는 경과를 밟게 되어 수술한 경우입니다.
다시 와서 기도해 달라는 기욱이 아버님의 말씀에 황송해 하며 고개를 떨구고 돌아 서는 내 맘은 크리스챤 의사의 사명이 어느 때보다 복잡하게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에서 한정된 지식으로 환자의 질병에 대한 치료 방침을 정하고 진료한다는 것.... 그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만 하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의사의 정확한 판단을 사용하신다는 것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은 방사선학적, 검사실적 결과를 분석하여 이끌어 낸 가장 합리적인 정확한 판단을 사용하셨습니다.
물론 우리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도 낫게 하시지만 병원에 근무하는 기독 의사로서 신자의 질병을 대하고 진료하는 태도는 합리적이고 정확한 판단을 사용해야 함이 새삼 느껴졌습니다.
만일 그 때 내가 복부 방사선 촬영 소견을 듣지 못하고 기욱이와 아버님께 수술을 거부하라고 종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매달리고 기대하자는 말에 동감하면서....) 기욱이 오빠가 수술을 끝까지 거부하고 있었더라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물론 하나님께서 또 다른 방식으로 일하셨겠지만...... 이번과 같이 수술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좋은(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선택이었습니다.
3층 내시경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병재는 연신 소리를 냅니다.
"주여!! Healing 되게 해 주시옵소서....."
병재의 말투가 웃겨서 미소를 지어 보이지만 여전히 내게는 기도하지 않고는 그냥 지낼 수 없는 크리스챤 의사의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